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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만능희극배우이자 영화인 "찰리 채플린"

성장기

 

 

본명 : Sir Charles Spencer " Charlie" Chaplin, 1889년 4월 16일생

어린 시절을 너무나도 불행하게 보냈다.

뮤직홀의 배우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술주정뱅이 아버지 때문에 어린 나이에

부모의 이혼을 보게 된다.

이후, 어머니마저 후두염으로 목소리를 잃게 되자 뮤직홀을 그만두게 되면서 집안 사정은

극도로 찌들게 되었다.

어머니가 정신병원까지 드나들게 되자 채플린은 잠깐 재혼한 아버지의 집에서 잠깐 지내게 되었으나

고아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은 공평하다고 했던가,,, 그에게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타고나 연기력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뮤직홀의 아역배우로 섰는데 이것은 그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8세의 어린 나이로 극단 "8인의 랭커셔 소년들"이라는 곳에 들어가게 되었다.

14살 때 [짐, 런던 내기의 사랑], [셜록홈스] 등에 출연하면서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여러 극단에서 경험을 쌓은 채플린은 17세에 극단"카노"에 입단하여 22세까지 활동하면서 

배우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배우생활

1912 년년 미국의 키스톤 스튜디오에 캐스팅되어 할리우드에서의 생활을 본격화하면서 배우로서의 꿈을 펼치게 되었다.

1914년 드디어 미국에서의 첫 영화 [생활비 벌기]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영화 [베니스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캐릭터가 거의 완성되었다.

이후, 각본, 감독, 주연까지 하는 수십 편의 영화 속에서 채플린의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 모닝코트, 지팡이를 활용하며

엄청난 인기를 끌며 세계적인 대스타가 되어갔다. 1918년 그는 전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배우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소품들은 상품으로 제작되어 지금도 인기를 누리며 전 세계에서 판매되고 있다.

작품들은 주로 사회비판, 풍자 등이 주재료여서 정치적으로 휘말려 1952년 스위스로 이주하는 시절도 있었다.

그는 무성영화, 무성영화를 넘나드는 영화인이다.

유명 작품으로는 무성영화 [모던타임스], 유성영화 [위대한 독재자] 등이 있다.

 

배우자는 첫 번째 부인 "리타 그레이", 두 번째 부인 "폴래트 고다드", 세 번째 부인 "우나 오일"이 있다.

54세 때 만난 세 번째 부인과 197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했다.

 

미국으로 복귀한 후 그의 작품은 슬픔과 코믹이 섞여있는 자신의 모습을

슬랩스틱으로 보여주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쫓아낸 미국이지만 그의 예술성을 인정하며

1972년 미국 아카데미상은 "공로상"을 수여하게 된다.

그리고, 1999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2년, "미국영화연구소"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배우 50인 중

남자 배우 10위에 이름을 올렸다.

 

연도별 주요 작품

1914년 

   [생활비 벌기] [베니스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 [메이벨의 이상한 곤경] [필름 조니] [잔인한 사랑] [녹아웃] [웃음가스]

1915년

   [그의 새직장] [밤 외출] [챔피언] [공원에서] 값싼 도주] [떠돌이] [해변에서] [작업] [여자] [은행] [유괴] 

   [한밤의 쇼] [희화한 카르멘].  특히, 1915년 15편의 작품은 채플린이 직접 감독, 각본, 주연까지 맡음.

1916년   [새벽 한 시] [전당포] [링크]

1917년   [이지 스트리트] [이민자]

1918년   [개의 생활] [동맹] [어깨총]

1919년   [서니 사이드] [즐거운 하루]

1921년  [키드] [유한계급]

1922년  [봉급날]

1923년  [순례자] [파리의 여인]

1925년  [황금광 시대] 

1931년  [시티 라이트]

1936년  [모던타임스]

1940년  [위대한 독재자]

1947년  [살인광 시대]

1952년  [라임라이트]

1957년  [뉴욕의 왕]

1967년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

1975년  [젠틀맨 트램프]

 

마지막 주연을 맡은 [뉴욕의 왕]에서 미국을 비판하고 영화의 평은 좋지 않았지만

그의 영화인으로서의 소신과 신념은 변함없었다. 

1952년 [라임라이트]로 1973년 늦게나마 "아카데미 음악상"도 받게 되었다.

1977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향년 88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회를 비판하여 미운털이 박히기도 하고, 반대급부로 대중들에게는 사랑을 많이 받은 채플린은

배우로, 제작자로, 감독으로 전 세계가 기억하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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